본문 바로가기

일상,취미/영화

베테랑-“쪽 팔리게 살지 말자.”

안녕하세요. 영화 읽어주는 남자 박샘입니다.

언제부터 영화 읽어주기 시작했냐고요?

오늘부터요.

뭐를 얼마나 알길래 영화를 읽어주냐고요?

몰라요. 모릅니다. 하지만, 제 나름대로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움이 되냐고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영화의 행간을 짚어내는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읽어주냐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여차하면 한, 두 번 정도 더하다가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고건 제 마음대로.ㅎ

 

[베테랑을 보고] [스포일러 주의!]

베테랑 다 보셨죠? 천 만 관객은 무난히 넘을 것 같고.

부당거래(2010)-베를린(2012)-베테랑(2015)으로 이어지는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자못 흥미롭습니다.

'짝패(2006)'에서는 충무로 액션 키드로 불리던 감독이 이제는 꽤 믿고 볼 수 있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과거 그의 영화는 넘치는 끼가 영화 내에서 각축전을 벌이며 혼재되어 있던 상태였다면, 이제는 제법 디테일을 갖추면서 영화의 재미와 무게를 동시에 만족시켜주고 있습니다.

베테랑은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지만 그 안에서 주제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법 우아한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키워드는 "쪽팔리지 않게"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2시간 영화 속에서 비슷한 대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자못 지루해질 우려가 있으나, 동시에 감독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법으로는 효과적입니다.

감독은 주인공을 통해 "쪽팔리지 않게 살자"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쪽팔리지 않게 살자"고 언급하는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동료 형사에게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하는 장면]

극 중 악역으로 등장하는 조태오(유아인 역) 사건의 관할 경찰서 형사는 돈으로 매수된 듯 합니다.

매수된 형사는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 하며 피해자들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합의하도록 종용합니다.

이 때 그의 선택은 독단적이라기보다는 조직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의 상관은 악역인 조태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미래 역시 (악당과 가까운) 상관과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은 이제 우리 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금전적인 지원까지 있으면 우리는 금새 비겁해지곤 합니다.

이 부분을 불만시 여기던 주인공 서도철(황정민 역)은 매수된 형사의 팔을 꺾으며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쪽팔리게 좀 살지 말자."

 

[서도철을 찾아온 감찰팀과 대치하는 장면]

경찰의 수뇌부와 연결되어 있는 자본 권력을 경계 없이 파헤치고 다니는 서도철은 여기저기에서 위협을 받습니다.

그 중 같은 경찰 내부의 감사팀에게 조사를 받는 장면은 꽤 상징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조직의 외부와 싸우기도 전에 이미 내부의 적들과 싸우느라 지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대의를 위한답시고 모인 집단들이 자신의 이익과 조직의 가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사분오열하는 모습을 우리는 매스컴과 생활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태오 사건을 조사하면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서도철에게 감사팀이 찾아와, 서도철에게 불리한 자료들을 제시하며 쓸 데 없이 일 벌이지 말고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합니다.

계속 이러면 주변 사람들이 더 피곤해진다는 클리셰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찾아온 감사팀이 정식 절차도 받지 않고 임의로 서도철을 찾아와 압박하고, 비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서도철에 대한 감사팀의 압박은 공식 절차를 거친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점을 들어 감사팀을 내쫓으면 서도철이 항의하듯이 이야기합니다.

"쪽팔린줄들을 좀 알아라!"

 

[서도철의 부인이 경찰서에 찾아오는 장면]

서도철이 지속적으로 사건을 들쑤시고 다니자 조태오의 측근은 갖은 수를 쓰면서 서도철과 그의 가족들을 회유하고자 합니다.

회유대상에는 서도철의 부인도 포함되어 있지요.

조태오의 측근은 서도철의 부인에게 현금 다발이 담긴 명품 가방을 내밉니다.

명품 가방과 현금. 인간이라면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겠지요.

게다가 가방은 현대 여성에게 단순히 물건을 나르는 도구를 넘어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꽤 치명적인 매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남자에게는 차와 시계 따위가 그렇지요.)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현물은 증거가 될 수 있으니 현금만 5배 더 주고 가라고 할 것 같습니다.

저와 달리 서도철 부인은 선물을 재치있게 거절하고, 그 즉시 경찰서로 찾아가 서도철에게 화를 냅니다.

갑자기 부인이 화를 내자 당황하는 서도철에게 아내가 거칠게 외칩니다.

"내가 정말 쪽팔린 게 뭔 줄 알아? 그 가방에 잠깐 동안 마음이 흔들리더라. 나도 여자야.(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냐?)"

 

이 세가지 장면은 정확하게 세 가지의 키워드와 연결됩니다.

돈, 권력, 명예.

첫번째 장면에서는 돈에 매수된 형사가 쪽팔립니다.

두번째 장면에서는 권력에 휘둘리는 감사팀이 쪽팔립니다.

세번째 장면에서는 더러운 유혹에 흔들리는 내 명예(자존심)가 쪽팔립니다.

 

그렇다면 쪽팔린 이유는 뭘까요?

간단합니다. 인간의 권위가 다른 가치 앞에 무너졌기 때문이지요.

감독이 내세우는 쪽팔린 기준은 사실 심플합니다.

우리의 권위-인권, 자존심, 가오 등으로 표현되는 것들이 다른 것들에 비해 밀릴 때 우리는 쪽팔리게 됩니다.

즉, 내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존엄성과 자존심, 개인적인 신념들이 돈, 권력, 명예 따위 밑에 무릎 꿇을 때 쪽팔린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영화 속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돈, 권력, 명예에 휘둘리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버느라 비굴해지고, 권력 앞에서 나약해지고, 명예를 얻기 위해 비겁해지는 것이 당연한 세상입니다.

영화 속의 서도철은 이 점을 시원하게 꿰뚫으며 더러운 세상에 펀치를 날려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동시에 그와 같은 캐릭터가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영화적이기에 우리는 극장을 나서며 강한 비트의 신나는 엔딩 시그널과는 달리 입안으로 쓴 맛을 다시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번 영화를 본 사람들 혹은 우리 사회가 덜 쪽 팔리게 살 수 있을까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 오프닝 중 한 남자가 한강에 투신하기 전에 이를 말리는 동료와 나눈 대화를 통해 그 가능성을 살펴보시죠.

사장: "니들 방금 봤냐? 밑에 말야.
물 속에... 뭐 커다랗고 시커먼게 물속에... 정말 못봤어?

친구: "뭐 임마 뭐~"

사장: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살아들"

(투신)

'일상,취미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경고음과 함께 온다, "La La Land"  (0) 2016.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