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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유연하시게



“유연하시게. 정말, 정말 유연하시게."

가득 찬 맥주잔은 비워지지 않았다.
지천명을 넘어선 노선배는 이미 취기가 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보적인 교직 단체에서 높은자리 까지 하셨던 선배는 강직한 인상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후회와 확신, 자부심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이었다.
이제는 한 기관의 대표 역할까지 하시는 분께서 뭐가 그리 아쉬워 이리 늦게까지 후배들에게 조언을 멈추지 않으실까.

“유연해야 했어. 젊은 날에는 내가 옳다는 생각과 패기에 세상 무서울 게 없었지. 조금 이라도 그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주저없이 일어서서 반대를 외치던 시절이 있었어. 덕분에 내게 고마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았지. 적이 많았던 것이야 두말 할 나위 없었고. 그래도 내가 옳은 것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어."

민주화 시대의 주역이었던 486세대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 세대에게는 전설처럼 들린다.
너무 대단하지만, 너무 먼 것이어서 실감이 잘 나지 않는 그런 것.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그 혜택이 어디서 왔는지는 잊고 사는 그런 것.
옛날 옛적 전래동화를 듣는 느낌이라면 너무 과할까.

“나와 다른 사람은 모두 적처럼 느껴졌지. 필요하다면 싸움을 피하지 않았어. 덕분에 바뀐 것도 정말 많다고 생각해.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니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걱정하게 되네. 자네같은 후배를 만나면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거침이 없고 도전적이었지. 유아독존이었어. 부드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너무 몰랐지 않아 싶네. 이제와서 부드러워지려고 하니 잘 되지 않아. 개인일 때는 한없이 단단해도 괜찮았는데, 대표가 되니 부드럽지 않아 어려워."

말을 마친 노선배는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우리는 건배도 없이 함께 잔을 비웠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어디쯤인지도 가늠하기 힘든 때, 노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으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중심을 잃을듯 말듯 직진하는 선배의 뒷모습을 본다.
취한 노선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유연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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